김동호의 스타트업 이야기

한국신용데이터, 오픈서베이, 그리고 기업가정신

나는 오늘도 별일 없이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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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이 세상을 백수로 산다는 건 생각처럼 어렵지 않다. 대학교 교양수업시간, 선생님이 갑자기 백지를 내밀며 아무 주제나 좋으니 글을 쓰란다. 글을 써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겐 백지의 광활한 공백은 공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백 앞에 내쳐져서 자주 그것과 씨름해본 자들, 즉 자주 글을 써본 사람들은 그 공백이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그들에게 백지란 존재는 ‘뭘 쓰면 좋을까’ 를 고민하게 만드는 설렘의 장(場)이다. 물론 그들도 공백이 두렵다. 하지만 설렘이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한다.

자발적 백수가 삶이란 이름의 묵직한 공백을 살아내는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직장을 관두고 재택 아르바이트로 밥벌이를 한 지 햇수로 5년. ‘출근도 퇴근도 상사도 회의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스케줄의 하루가 어느새 내겐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텅 빈 하루’가 처음부터 무섭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직장 없이도 살아지는 하루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조금씩 직업 없는 삶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거다. 안정된 미래,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을 포기하는 순간 얻게 되는 또 다른 세상. 그 세상 속에서 나는 직장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가치들과 어떤 기쁨들을 깨달아가고 있다.

백수가 된 뒤 가장 큰 변화는 부지런해진 것이다. 직장을 다니지 않으면 시간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침 9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으라고 명령하는 학교나 직장, 즉 사회가 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난다. 하지만 백수에겐 일어나라고 명령하는 사회가 없다. 출근해야 할 ‘내일’도 없다. 그래서 ‘AM과 PM’, ‘월화수목금토일’에 별다른 의미가 없어진다. 시간적 마디의 실종. 백수에게 시간은 분절되지 않은 거대한 덩어리로 존재한다. 거대한 것들 앞에 서면 누구라도 겁을 먹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은 백수가 되길 두려워하고 백수가 된 사람들은 좌절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암흑 같은 거대한 시간 앞에 내던져지게 되면 절감하게 되는 게 있다.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뻔하디 뻔한 사실이다. 이 뻔한 걸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깨닫게 될 때 사람은 혼돈 속에서 스스로 질서를 세우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사장이 9시에 출근하라고 해서 7시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내가 7시에 등산을 하고 싶기 때문에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도태되기 싫어서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공부를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내가 바로 내 삶의 주체가 될 때 사람은 부지런해진다. 강인해진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질서 속에서 사는 대신 내 손으로 질서를 일구고 내 의지로 그걸 실천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겪다 보면 내공이 쌓이고 배포가 커진다. 내 삶 정도는 내가 추스를 수 있다는 믿음이 드는 것이다. 불안한 미래, 거대한 공백에 맞설 용기는 그렇게 생겨난다. … (후략)

사과나무 2010년 8월호 “나는 오늘도 별일 없이 쉰다” (정진아作)

Written by Kelvin Dongho Kim

2011/02/25 , 시간: 17:50

일상의 순간에 게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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