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스타트업 이야기

한국신용데이터, 오픈서베이, 그리고 기업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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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브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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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원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마이클 슈마허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으리라. 1994년을 시작으로 이후 10년 동안 월드 챔피언을 7번이나 했으니 말이다. 난 당시 경기 중에 1995년 그랑프리 장면을 종종 돌려보곤 하는데, 그중 백미는 바로 슈마허가 알레시를 추월하는 순간이다.

승부는 커브 길에서 난다. 앞서가던 사람은 보통 안쪽으로 주행하며 거리를 줄이지만, 방향전환을 빠르게 해야 하는 까닭에 감속의 폭 또한 크다. 따라서 뒤따라가던 사람의 유일한 추월 차선은 커브 길의 바깥쪽이다. 더 긴 거리를 돌지만, 속력을 덜 줄이기 때문에 이어지는 직선 구간에서 치고 나갈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상용인터넷이 개시된 직후 창립된 다음커뮤니케이션과 갤럭시S 출시 직전 서비스를 개시한 카카오톡은, 커브 길에서 승부를 걸었던 패기 어린 벤처기업이었다. 물론 같은 방향으로 승부를 걸었던 경쟁자가 수없이 많았기에 그 안에서의 자리다툼 또한 만만치 않을 테다. 하지만 시작이 반인 만큼 이미 타이밍에서 적잖이 걸러짐이 분명하다.

소비자 분석을 업으로 삼고 있는 첫 번째 회사는 스마트폰 보급률이 15%에 불과할 때 설립된 까닭에, 훌륭한 엔젤 투자자와 초기 구성원을 경쟁이 격화되기 전 모을 수 있는 운이 따랐었다. 스마트폰의 보급이란 거대한 흐름에 탔던 거다. 이후 조직의 성장과 개인으로서의 기여분은 반비례했을 테니, 결국 나의 가장 큰 역할은 적절한 때에 시작한 것 그 자체였을 테다.

한편, 지난봄 설립한 두 번째 회사는 리스크 평가를 업으로 삼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중소사업자 대출에 집중하는 이유는, 연 400조 원에 이를 만큼 거대한 규모지만, 오랫동안 법적·기술적 제약으로 인해 시장참여자 누구도 만족스럽지 못하게 운영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크다.

하지만 리스크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금융산업은 변화하기 쉽지 않다. 특히 라이센스를 얻기 위한 최소 요건과 규제 비용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한데. 금융위원회가 이번 달 중순 입법예고한 신용정보법 개정안을 보면 묘한 기류를 느낄 수 있다. 커브 길에 들어선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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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llow Korner라고 프랑스 파리에서 2006년에 시작된 스튜디오가 있는데 얼마 전 한국에 첫 번째 매장을 냈다. 컨셉이 ‘위대한 사진작가의 작품을 가능한 많은 사람이 소장할 수 있도록 5,000달러에 10장을 파는 대신 100달러에 500장을 파는 것’이라고. 기실 사진전에서 맘에 드는 작품을 마주해도, 하나에 기백만 원은 하는 까닭에 쉽게 지갑을 열기 어려웠던 경험이 한 번쯤 있을 텐데 그 부분을 잘 긁어준다.

지난 주말에 갔더니 아직 개장 초기라 사람이 적어 여유 있게 둘러보다가 마음에 쏙 드는 사진을 발견했다. 런던 태생 Jonathan Chritchley가 촬영한 작품으로, 얼핏 보면 잔잔한 사진이지만 자세히 보면 요트가 우현으로 살짝 꺾여있다. 다시 말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선체를 기울여서 전체적인 평형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다. 사진에 담긴 뜻을 알고 나니 이건 꼭 집에 걸어놓고 두고두고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Thendara, Saint-Tropez by Jonathan Chritchley

Thendara, Saint-Tropez by Jonathan Chritchley

이 사진은 요트를 운항하는 방법이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일을 하다 보면 종종 어려운 문제를 마주하게 되는 데 사람인지라 그걸 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문제를 외면해서는 바람에 뒤집히는 배처럼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더라. 큰바람이 불어올 때에는 그 방향으로 선체를 크게 기울여야만 평형이 맞춰진다. 절실한 마음으로 위태로워 보이는 자세를 취해야만, 그 때야 균형이 잡히는 거다. 그러니 큰 문제를 마주했을 때에는 그 방향으로 몸을 힘껏 내던져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테다.

지금까지 충분히 그러지 못해왔음에 깊이 반성하고, 앞으로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기꺼이 뛰어들겠다 다짐한다.

Written by Kelvin Dongho Kim

2014/12/08 at 00:37

사선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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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전투의 양상과 사선대형의 차이

일반대형과 사선대형 차이 (빨간색이 정예전력)

전술의 기본은 내가 약하든 강하든 상대방의 약한 곳을 치는데 있다. 적은 분할하고 나는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과 나의 전력차이가 벌어질수록 이게 잘 안통한다. 우리는 이순신의 명량해전처럼 수 배 이상의 병력을 무너뜨리는 영웅담에 매료되곤 하지만, 그건 기실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이다. 전쟁에 이기려면 이길 싸움에 이기고 질 싸움은 피하는 것이 옳다.

그래도 어느 전투에서나 한 쪽은 열세가 되기마련인데, 기원전 371년 테베의 젊은 장군 에파미논다스와 6천여 명의 병사들이 그랬다. 스파르타의 왕 클레옴브로토스가 1만 1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테베로 진격해왔고 이들은 아테네 북서쪽의 레욱트라에서 맞붙었다.

당시 스파르타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밀집된 형태의 장창 보병대의 형태로 (팔랑크스, Phalanx) 전투에 참여했는데. 횡과 종으로 12명이 늘어서 전방 전투원이 부상당하면 후방과 자리를 바꾸며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큰 특징이었다. 오른손으로 싸우고 왼손으로 방어하는 형태이다보니, 전투 중에는 자연스럽게 반시계 방향으로 전장의 구도가 회전했고. (오른손으로 공격하려면 왼발을 내딛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얼마나 빠르게 좌익을 무너뜨리고 적의 사령부를 타격하느냐가 승패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기에 우익에 배치되는건 가장 위험하면서도 명예로운 일이었고, 때문에 이 곳에는 늘 최고의 전력이 배치되었다. 다른 말로는 중앙과 좌익은 보통 수준의 병사들로 구성된다는 뜻이다. 에파미논다스는 이 점을 역으로 이용했다. 스파르타 정예가 치고들어오는 좌익을 적의 4배 수준으로 (종심 50열) 강화하며 승부를 걸었고, 동시에 상대적으로 얇아진 중앙과 우익이 적군과 마주치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위해 사선대형으로 군대를 배치했다. 좌익을 빠르게 진격시켜 열세인 구역이 전장에 끌려들어가기 전에 스파르타 사령부를 괴멸시켜 버릴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구현된 사선대형

레욱트라 전투의 흐름: 사선대형은 시간과 공간을 따로 분할함으로써 열세를 극복하게 만들었다

물론 대형 하나만으로 이긴건 아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테베가 기병대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운이 따라줬다. 패주하는 스파르타 기병이 팔랑크스에 뛰어들면서 보병 대열을 흐트렸고, 혼란상황에서 전력마저 수 배 차이났기 때문에 전열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테베의 우익이 스파르타의 좌익이 제대로 맞부딯치기도 전에 본진의 클레옴브로토스 왕까지 타격해 전사시켰다. 스파르타 왕이 전투에서 죽은건 레오니다스 이후 백 년 만이었다. (레오니다스가 전사한 테르모필레 협곡전투는 영화 300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레욱트라 전투를 흔한 영웅담으로 취급할 수 없는 까닭은 이것이 전쟁사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사선대형은 전투에서 고려할 수 있는 전략의 차원을 재정의했다. 이전에는 공간 분할만이 유일한 각개격파 방법이었는데. 에파미논다스가 시간이라는 차원을 더했다. 만약 좌익과 중앙 그리고 우익이 동일 시점에 맞부딯쳤다면 중앙과 우익이 무너지며 좌익마저 적군에게 포위당했을테다. 하지만 사선대형은 아군에게 유리한 구역에서의 전투를 ‘먼저’ 시작하고, 불리한 구역에서의 전투는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상대방이 병력우세를 활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특정 구역에서 테베군이 우세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냈고. 그 시간은 판도를 결정하기에 충분했다.

Written by Kelvin Dongho Kim

2014/02/01 at 02:42

우직 (迂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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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세에서는 끊임없이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를 우직(迂直)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아군이 진출하는 길을 일부러 우회하여, 적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나 적의 대비가 없거나 약한 지역으로 진출한다. 그리하여 적의 견제를 피하고, 재빨리 빼앗아야 할 작전 목표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겉으로는 먼 거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적이 막지 않는 빈틈을 찌르며 가장 빠르게 ‘곧을 길’을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이다. – 조조병법 7장 [전투] 중에서

Written by Kelvin Dongho Kim

2013/09/03 at 00:15

전술과 전략에 게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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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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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사선으로 출근한다 – 날아다니는 총알만 보이지 않을뿐이다. 몸을 사리지 않고 돌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팽팽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후방으로 빠지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상대편 몰래 특공대를 운용해 판도를 바꾸려고도 한다. 중요한 사실은,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끊임없이 전투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무엇보다 기세가 중요했다. 일렬로 돌격하는 상황에서는, 앞으로 나가며 칼에 힘을 실을 순 있어도 뒤로 물러날때엔 불가능한 까닭이다. 밀리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총으로 대변되는 원거리 무기가 보급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전략의 범위가 넓어졌고, 수적으로 열세인 군대가 이기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머리수가 적다고 무조건 불평할 일이 아니게 된 셈이다.

사업초기에는 자원이 부족해서 백병전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특출난 장수 한 두명이 전장을 휘저을 수 있었고, 또 그럴 수 있을만한 판만 선택했다. 그러다 사업이 한 단계 나아가면서 – 총을 갖게 되었을 때 – 복합적인 전략구상이 가능해졌는데. 복잡한 전략을 실행하려면 합이 잘 맞아야한다. 눈빛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오래된 전우가 빛을 발하는 시점이다.

Written by Kelvin Dongho Kim

2013/08/04 at 00:02